새벽의 동아리실엔 노트북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삿포로 맥주캔 몇 개가 올려진 책상 앞으로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기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히터가 꺼진 탓에 공기가 제법 차다.
“우리…”
초등학생 때, 나는 한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얼굴이 예뻐 그 아이 주변엔 항상 남자아이들이 가득했고, 그다지 잘난 것도 없던 나는 항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뒤로 빠져있었다. 그래도 밤새 하던 기도가 어느정도 통했는지 짝꿍이 되는 일이 잦아서 친해질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는 감쪽같이 전학을 가버렸다. 연락은 자연스레 뜸해졌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한 계기로 그 아이를 만났다. 여전히 예쁜 얼굴. 나는 운이 좋게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공부를 잘하던 그 아이를 따라 공부에 힘을 쏟았다. 시간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햇살 속을 유영하더니 철로 끝에 구름 성을 지었다. 흔한 첫사랑 이야기처럼 끝은 헤어짐이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첫사랑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이 아이를 떠올린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에게 첫사랑의 오롯한 감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인지 김종욱 찾기는 나에게 자연스레 다가왔다. 주인공의 두려움에 깊은 공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소재와 색감이 마음에 들어 이후에도 몇 번 보았다. 물론 공감은 늘 실패했다. 내가 살아온 바로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도 후엔 결과가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몇 번의 잿더미가 날아간 이후엔 오히려 그 모습이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너랑 오래 보고 싶은데 왜 연애를 해야해?”
가로등 아래 선 여자가 원망하듯 말했다. 일전에 그녀는 김종욱 찾기의 여주인공을 좋아한다고 했다. 호두과자 하나를 남기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겠다면서.
“우리가 함께라면, 더 오래 행복할거야.”
남자는 설득 아닌 설득을 시도한다. 그는 도전을 즐기는 바람직한 현대인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마지막 호두과자 하나가 남았다면, 꿀꺽 삼킨 뒤에 ‘다음에 또 먹어야지’하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2018년 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누나를 좋아했다. 누나는 언니네 이발관의 ‘아름다운 것’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이 노래를 부른 이석원은 ‘보통의 존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랑하자는 건 헤어지자는 거지. 안 그래?’
누나는 그 날 새벽에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사랑이 언제나 아름답지는 않지만’을 나지막이 부르며 설득한 끝에 우리는 손을 잡았다. 연애는 하나의 춤과 같다. 때로는 상대의 발을 밟기도 하고, 눈을 맞추기도 하며 모든 몸짓을 함께한다. 가깝고 멀어지길 반복할 때 함께 서 있는 모든 곳이 무대가 되어 주변 것들은 두 사람을 익숙하게 조명한다.
그때 쯤 누나의 일기장엔 김종욱 찾기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뻔뻔하게 여주인공을 욕하며 볼 날이 온다면 소원이 없겠다며.
장밋빛 세상을 꿈꾸던 소년이 어른이 되어 우중충한 녹색의 골짜기에 들어가있다. 그는 마룻바닥에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다. 어릴 적 물통에 떨어뜨린 검은 물감처럼 구름이 하늘을 스라렸다. 이윽고 소나기가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전화기는 귀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는 복귀장소 앞에 서서 휴대폰을 다시 켰다.
“네 말대로 하는게 맞는 것 같아. 나쁜 사람 만들어서 미안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야할 길을 갔다.
춤이 끝나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짙은 흉터 하나가 생겼다. 그러니까, 김종욱찾기의 여주인공을 욕하지는 못할지언정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이를 조금씩 먹으며 자연스레 사람까지 가리니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고, 코로나로 사람 만날 일이 적어진 것은 덤이었다. 단절은 두려움을 만들었다.
사람을 만나 진실된 나를 보여주는 일. 새로이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 우연히 맡은 향기에 호기롭게 깃발을 세우는 일. 의미가 부여되는 많은 일들이 두려워졌다.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며 떠나기보다, 끝은 있더라며 평평히 서있게 되었다. 나는 김종욱 찾기의 여주인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끝에 가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끝에 가는게 무서워졌다.
어떤 영화들은 끝마침이 너무 강렬해서 새로운 영화를 보기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이 진부하지만 닫힌 안도감을 바라기도 한다. 그렇다고 맺어지지 않는 결말을 쓰겠다며 헛튼 문장을 반복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미완의 습작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첫문장은 진흙 묻은 신의 밧줄과 같다. 무의식의 세계에 태초의 인식을 가하면 새로운 관계가 정의되고 모든 것이 간섭한다. 올해 나이 스물 다섯. 이만큼 설레는 첫 시작이 두렵다고 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닐까. 이제 끝나지 않는 글은 옆으로 밀어두고, 새하얀 공책을 열어 사각거리는 만년필을 끄적이려 한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김종욱찾기 뮤지컬을 보고싶다. 영화가 아니라 뮤지컬을 본다는 것에 의미부여 하고선 뻔뻔하게 여주인공을 욕하고 싶다. 끝나지 않는다면 옆으로 미뤄둬도 된다고 , 첫문장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되뇌이고 싶다.
* 계절학기 과제 '코로나가 끝나면 보고싶은 공연과 그 이유'에 대해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