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나는 참 많은 부분에서 형의 길을 걸어왔다. '형만큼은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학창시절 공부를 했고, 형의 성적을 보고 자극받았다. 기타를 제대로 치게 된 계기도 형 덕분이었고, 집에서 반대하던 많은 것들을 형이 먼저 헤쳐나갔기에 내가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복싱도 형을 따라갔던게 시작이었다.
1. 일을 잘하는 방법
이번달로 복싱을 한 지 1년 정도 되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졸업할 때 1개월, 고등학교 졸업하고 3개월, 전역하고 8개월째. 나름 열심히 했다.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자세를 연습하고, 쉐도우를 하고, 샌드백을 쳤다.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선에서 스파링을 자주 부탁했다. 상대와 맞붙지 않으면 복싱을 배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스파링을 하고 나면 상대에게 나의 부족한 점을 물어보고, 스스로도 기억을 되짚은 후 고칠 점들을 노트에 적었다. 때로는 영상을 찍고서 자주 돌려봤다. 다음 스파링에 올라가기 직전에 노트를 보고 한두개의 생각할 거리만 가지고 올라갔다. 예를 들면 '셋업 신경쓰기'라던지, '거리 조절하기' 같은 것들.
수업에 늦게 가서 근력운동을 못한 날이면, 스스로 했다. 푸쉬업은 2~3일 간격으로 항상 했고, 다른 날에는 부족한 부분을 했다. 특히나 하체를 자주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운동처럼 복싱도 하체에서 밸런스와 파워가 나오기 때문이다. 집에 오면 당연히 열량과 단백질을 채워줬다. 여기서 내가 헬스를 그만두고 복싱을 다니기 시작한 이유가 나온다. 바로 음식섭취.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는지 헬스를 할 때면 모든 끼니에서 영양분을 챙기려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게 꽤 스트레스였는데 복싱은 근비대가 목적이 아니다 보니 그런 스트레스가 덜했다.
한 달 전에, 문득 새로운 복싱장에 가보고 싶었다. 다른 체육관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했고, 새로운 사람들과 스파링하며 다양한 걸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에 다른 복싱장에 다짜고짜 등록을 했다.
"6개월 정도 배웠습니다."하며 들어갔는데 실장님은 다짜고짜 미트를 잡아주시더니 "여태 본 '어디서 배워왔다는 사람'들 중에 제일 잘한다."라고 말해주셨다. 건들게 거의 없다고 하시더니, 한두개정도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기본 스탠스와 스트레이트를 살짝 바꿔보는 건 어떻냐고 말하시는데, 완전한 아마복싱 스타일이었다. 그렇다. 원래 체육관은 프로복싱 또는 MMA 스타일이었는데, 여기는 순수 아마복싱 체육관이었다.
사실 나는 아마복싱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지가 나지 않는달까...? 하지만, 내가 나중에 아마복싱 스타일을 쓰든 안쓰든, 배워놓으면 손해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아마복싱 스타일을 좋아하게 될수도 있고, 내 복싱 스타일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상대와 스파링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제 1달을 다녔다. 결론은 내 생각이 적중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코치분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새로운 스타일을 배우는 것도 신선하다. 거기다 나름 잘한다는 소리 들으면서 들어왔는데, 남들보다 2배는 열심히 하니까 다들 좋게 생각해주시고 도와주신다. 정체되어있던 실력이 꿈틀거린다. 대회의 길도 보이는 것 같고.
자, 이제 일을 잘하는 방법이 보이는가?
1. 지속적인 자기개발
2. 피드백, 자기성찰과 개선
3. 주저 앉지 말고, 새로운 것에 다가가기
4. 기회는 능력과 열정이 있는 이에게
(내가 복싱을 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잘하게된 과정의 이유로써 말하는 것이다.)
번외로, 새 체육관에 가서 샌드백을 치거나 스파링을 하다보면 "복싱 몇개월 했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난 "6개월 정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분들은 "6개월에 이정도면 진짜 소질있다."라는 등의 말씀을 해주셨다. 하지만 난 소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6개월 간 정말 열심히 했으니 다른 6개월 배운 분들이랑 차이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프로선수들은 재능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2. 원하는 것을 이뤄내는 방법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동물이기에, 가끔은 본능이 발휘된다. 격투기는 특히 남성에게 그 본능이 발휘되기 가장 좋은 스포츠 중에 하나다. 다른 수컷을 쓰러뜨리고 알파메일이 되는 것, 또는 승리자가 되는 것.
수능이 끝나고 복싱장에 등록했을 때, 혈기왕성한 수컷의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 내가 쟤 정도는 이기겠지." 나는 '쟤'와 스파링에 올라가서 글러브터치를 하는 순간까지도 자신만만했다. 쨉을 한 대 맞아도 주눅들진 않았다. 내가 상대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시점은, 카운터를 맞을 때였다. 그 때부턴 공격하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주먹을 뻗다가 상대에게 맞지는 않을까?' 생각에 무작정 가드만 하고 있었다. 내가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도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상대를 한 대 때리고 싶으면 나도 한 대 맞을 각오는 해야한다는 것을.
하물며, 그렇게 가드만 하고 있으면 더 맞는다. 상대가 얼마나 잘하든 어차피 맞을거면 어떻게든 주먹을 휘둘러야한다. 첫 스파링에서 좌절감을 느낀 수컷은 일반적으로 두가지 중 하나의 행동 양상을 보인다. 체육관을 그만 나오거나, 연습에 몰두하거나. 전자는 아마 스스로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 아닐까싶다.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그러니 이 글을 쓰고 있지.
후자를 선택한 수컷은 자신과 비슷한 상대와 어느정도 겨뤄볼만한 실력이 된다. 수컷에겐 점점 자신감이 붙는데, 어느 날은 관장님이 체급도 높고 리치도 긴 상대와 한번 붙어보라고 한다. 링 위에 선 수컷은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첫 스파링에서의 수컷이 아니었고, 그는 주먹을 내뻗는다. 하지만 맞지 않는다. 분명 동시에 주먹을 뻗었는데도 상대의 주먹은 수컷의 머리에 닿고, 수컷의 주먹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나는 두려웠다. 아까처럼 또 주먹을 뻗다가 주먹을 맞을까봐.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주먹을 자꾸 던졌다. 잘 던지진 못했다. 뻗은 주먹이 얼른 나의 얼굴에 다가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상대의 주먹을 막아주었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꼼수 부리면 뭐하나, 열심히 얻어맞았다.
끝나고나서, 아저씨에게 다가가 부족한 점을 말해줄 수 있냐고 여쭤보니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분명 닿는 거린데, 2cm가 모자라. 그게, 주먹 끝이 안살아서 그래. 주먹을 끝까지 뻗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끝까지 안뻗는거야. 자신감이 없는거지. 스스로를 못믿는거고. '내가 이거 맞힐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맞아."
복싱의 재밌는 점은, 링 위에 올라간 순간 믿을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 대신에 상대를 때려눕혀주거나 주먹을 막아줄 팀원은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스스로를 더 믿어야하지만, 그만큼 더 스스로를 믿기 힘들다. 정말 힘들다. 무섭다. 그걸 이겨내고 자신감을 얻기위해 연습을 하고, 스파링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를 믿을 수 있고 주먹 끝이 살 수 있다.
자, 이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이루는지 보이는가?
1.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리스크를 각오해라. (또는 대비해라.)
2. 스스로를 믿어야 주먹 끝이 산다.
번외로, 한번은 코치님과의 스파링을 한 적 있었다. 항상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올라가지만, 맞을 것을 알고 올라가는 링은 항상 뜻밖의 일이 된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실력, 리치, 체급 차이에서 오는 두려움에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내려오니 코치님이 "상대가 어떻든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해야해요."라고 하셨다. 이후, 가끔 긴장되는 일을 할 때 이 생각을 하곤 한다.
3. 마치며 (변명)
이렇게 적고 보니 뭐라도 된 사람인 것처럼 적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제대로 한지 1년도 안된 한낯 복린이라는 것과, 포장 하나는 휘황찬란하게 하는 글쟁이라는 것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계절이 바뀌고 있는데, 다들 가을 내음 그윽한 하루 보낼 수 있기를 빌겠다. 읽어준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