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4년 9월, 당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디라도 그 감정을 풀었어야 했었으리라. 남들은 좋은 일을 기록하고 싶어하던데 나는 웃기게도 슬픈 일을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2021년 2월까지, 약 7년의 시간동안 일기를 썼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다. 7년의 시간 내에도 공백기간이 어느정도 있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을 잃고싶지 않아서다. 아무런 기록도 없이 오늘이 지나가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없는 날이 될까봐 오늘 했던 일과 생각을 적는 것이다. 진득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 글을 눌러쓰면 마음이 정리되고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때로는 대충 적어도 좋다. 그것 또한 미래의 나에게 소소한 재미를 줄 것이니까.
2.
일기를 쓰는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에게 일기는 하루 일과에 대한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자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친구와 다퉜다면 그런 상황이 생긴 이유부터 감정의 원천, 더 나아간다면 나는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으로 자랐는지까지 다 적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도와주는 것이 일기를 쓰는 방법이다.
나는 일기를 노트에 쓴다. 펜으로 꾹꾹 눌러쓰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표현을 가다듬는다. 일기가 깊은 사고를 담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며 일기장이 쌓일 때 마다 뿌듯함도 느낄 수 있다. 감성은 덤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일기를 쓰는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주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때때로 긴 소요시간은 일기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하여 나에게 공백기를 가지도록 한다. 적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은데 손이 안따라줄 때 얼마나 답답한지.
3.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일종의 자기PR 이었다. 개발자들이 자신이 오늘 무엇을 배웠는지(TIL)를 블로그에 기록하고 이것을 일종의 포트폴리오이자 이력서로 써먹는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아 나도 공부한 것이나 생각을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일종의 일기 대체재가 되었는데, 이젠 다시 못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시채용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스펙(포트폴리오)가 있어야하는데 일기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타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개인적인인, 날 것 그대로의 일기장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블로그에 한번 정제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두 개 다 쓰면 되지 않냐고? 그러면 시간이 굉장히 많이 소요된다. 비슷한 일을 두 번 반복하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가르쳐주셨다. 여기서 적자는 적응한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적자'할 때 그 말이었다. 법원에서 일기가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며 이곳저곳 써먹을 데가 많은 거라며 무엇이든 기록하라고 하셨었는데, 그 선생님은 앞을 얼마나 내다보신 걸까.
효율을 너무 따진 나머지, 자기 PR의 특이점이 온 것 마냥 일기를 취업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나의 상황이 꽤나 슬프다.